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 아이아코카 (문단 편집) ==== [[크라이슬러]]에서의 활동 ==== [[포드 모터 컴퍼니|포드]]에서 쫓겨난 아이아코카는 당시 폐업 직전이나 다름없었던 [[크라이슬러|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으로 옮겨 회사를 재건하기 위한 시도를 시작했다. 아이아코카는 크라이슬러를 재건하기 위해 먼저 35명에 달하는 부사장급 임원 중 33명을 경질하고, 그가 일했던 [[포드 모터 컴퍼니|포드]] 출신을 포함해 새로운 임원진을 구성하였다. 더불어 "1달러 연봉 선언"[* 사실 무임금 선언을 하면 법적 문제와 사회적 논란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 서류상으로 남겨놓는 것이다. 실제로 다른 주제이긴 하지만 오늘내일 하는 회사를 인수시 공짜로 한다면 그에따른 행정적 문제가 엄청나지기 때문에 형식상으로 1달러에 인수하는 것이다. 물론 그 만큼 리 아이아코카의 강력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기도 하지만.]을 하는 등으로 크라이슬러의 [[노동조합]]을 설득하여 2번이나 임금 삭감을 이끌어 냈으며 1980년 한 해만 1만 5천 명의 정규직원을 [[해고]]한 뒤 유럽 지사도 매각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하여 5억 달러에 달하는 비용 절감을 이루었다. 그리고 [[워싱턴 D.C.]]에 가서 상원, 하원 청문회에 불려 다니며 노력한 결과, 연방 정부로부터 15억 달러 규모의 융자금 보증을 얻어 냈다. 더 나아가 아이아코카는 유럽 지사인 [[생카]]와 [[루츠 그룹]]이 공동개발한 [[생카 호라이즌|소형차]]를 활용해 전륜구동 소형차 기술을 가지고 새 차를 개발했으며, [[포드 모터 컴퍼니|포드]]에서 구상했다가 받아들여지지 못한 [[닷지 캐러밴|미니밴]] [[플리머스 보이저|라인업]]이나 전륜구동 플랫폼인 K-바디 플랫폼을 만들어 히트시켰다. 그 베이스가 된 소형차인 [[생카 호라이즌]] 역시 [[플리머스]]와 [[닷지]]의 소형차로 출시해 성공시켰다. 그렇게 융자 보증을 받아낸 아이아코카는 [[가스터빈]] 엔진[* 20년 이상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이 개발해 왔으며 회사가 휘청이던 1977년에도 크라이슬러 브랜드의 엔트리 라인업 [[크라이슬러 레 바론|레 바론]]에 기반한 [[https://www.macsmotorcitygarage.com/turbine-swan-song-the-1977-chrysler-lebaron-turbine-concept/|콘셉트카]]를 출품하고 1979년에 선보일 계획까지 잡는 등, 양산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을 비롯한 비현실적인 계획들을 중단시켰고, 급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1981년에 K-바디 플랫폼으로 만든 첫 차인 [[플리머스 릴라이언트|플리머스 릴라이언트/닷지 아리스]] 중형차 라인을 출시했으며, 1983년 말에는 그 플랫폼을 개량해 만든 [[플리머스 보이저]]/[[닷지 캐러밴]] 미니밴 라인도 출시해 수익을 거두었다. 특히 이때는 미국에서 불황이 시작되었던지라 소형차의 수요가 높아졌고, 아리스/릴라이언트는 넓은 실내공간으로 거둔 6인승 인증 때문에 중형차였다 뿐이지 시장에서 전임 모델인 닷지 아스펜/플리머스 볼레어를 따라 준중형차로 분류할 정도로 상당히 작고 연비가 좋아 잘 팔렸다. 미니밴 역시 작으면서도 공간을 다양하게 사용할 수가 있어서, 당시의 대형 밴과 스테이션 왜건 사이의 틈새 수요를 잡아내는 데 성공하면서, 크라이슬러의 꾸준한 돈줄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또한 그는 회사의 기함으로 [[크라이슬러 임페리얼|임페리얼]]을 부활시켰고, 완전 전자식 연료분사장치나 완전 디지털 대시보드같은 신기술들을 대거 적용했다. [[프랭크 시나트라]]에게 첫 차를 주는 등의 시도로 흥행을 끌어 보려고 했던 것과 달리, 임페리얼은 품질 문제로 얼마 안 가 단종되어 수년 간 공백기를 맞이했다. 나아가 그는 회사 홍보의 일환으로 토크쇼, 광고, 발표회에 자주 참여해 자사 제품과 개발과정, 캠페인 등을 스스로 밝혀 미국 국민들의 신뢰를 사고, 회사 임원들에게 자부심을 안기기 위한 "자부심이 돌아왔다(Pride is Back)", "더 나은 차를 찾았다면 그걸 사라"는 모토를 활용한 캠페인도 주도했다.[* 또한 일각에서는 크라이슬러도 GM, 포드처럼 노골적인 뱃지 엔지니어링을 이용했음에도 오히려 1977년 폐업위기 이후로 각 브랜드가 무의미해진 크라이슬러였기에 오히려 개별 브랜드보다는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이라는 그룹 자체를 강조(즉, 크라이슬러 그룹이기에 남들과 다르다)하는 마케팅으로 뱃지 엔지니어링을 역이용해 기업 이미지 항상에 활용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당시 크라이슬러에서 닷지와 플리머스 차량을 한 광고에 등장시키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을 "크라이슬러 미니밴"이나 "K-카"같은 표현으로 수식한 것이 그 근거.[[https://www.curbsideclassic.com/curbside-classics-american/curbside-classic-1990-oldsmobile-silhouette-how-hard-can-it-be-to-make-a-minivan-part-3/|#]]] 이런 노력 끝에 [[1982년]] 여름, 크라이슬러의 회장으로 된 지 만 7년이 되기 전에 아이아코카는 고질적인 부채 15억 달러를 일시에 갚고 7억 달러의 순이익을 남기는 [[신화]]를 이루어냈다. 5% 삭감했던 [[노동자]] 연봉도 원래 수준으로 올려 놓았고 해임했던 직원들의 상당수도 다시 불러들였다. 이렇게 회사가 커지다보니 아이아코카는 [[밥 루츠]]를 포함해 [[포드 모터 컴퍼니|포드]]에서 일했던 회사 동료들을 크라이슬러로 데려왔으며, K-바디 플랫폼을 대거 활용해 수많은 신차들을 개발하게 하는 건 물론 평소 관심을 두어 왔던 [[아메리칸 모터스 코퍼레이션|AMC]]/[[지프]], [[람보르기니]] 등을 1987년에 인수했다. 그렇게 인수한 지프를 통해 크라이슬러의 돈줄로 삼은 건 물론, [[지프 랭글러]]나 [[지프 체로키|체로키]], [[지프 그랜드 체로키|그랜드 체로키]] 등의 히트작들을 개발해냈던 [[AMC]] 내의 인재들을 자사의 차량 개발 프로젝트에 투입하고 창의적인 제품개발 과정을 도입하기까지 했다.[* 그 중 아이아코카가 좋아했던 그랜드 체로키는 당시에 개발이 거의 다 되어 있었는데, 체로키의 후속이었던 게 너무 커지자 그 윗급 라인업으로 개조해 수년 뒤인 1992년에야 출시될 수 있었다. 또한 AMC의 제품기획을 물려받음에 따라 르노 기반 준대형차인 [[이글 프리미어]]의 세로배치 전륜구동 플랫폼 구성을 참조해 차기 대형차 플랫폼인 [[크라이슬러 LH 플랫폼]]에 반영하거나, 당시 개발중이던 AMC의 소형차 기획을 크라이슬러의 자체 브랜드로 편입시켜 [[닷지 네온]]으로 출시한 사례도 있었다. 닷지 네온의 원형 헤드램프도 리 아이아코카가 제안하여 밀어붙였다.][* 당시 크라이슬러로 영입된 인재 중 하나가 르노/AMC 출신의 엔지니어인 [[https://moparinsiders.com/former-chrysler-engineering-wizard-francois-castaing-has-passed-away/|프랑수아 카스탱]](Francois Castaing)으로 플랫폼 팀을 혁신, 각 차량의 부위별, 담당업무별로 쪼개져 있던 제품개발팀을 철폐하고 컨셉트부터 양산에 이르는 프로젝트 팀을 구축해 보다 적은 인원으로도 빠르고 저렴하게 신차를 개발할 수 있는 제품개발환경을 구축했다. 이렇게 AMC의 창의적이고 유연한 인재들과 제품개발과정이 1990년대 크라이슬러 내부에 널리 퍼짐에 따라, 1990년대의 크라이슬러는 오히려 AMC가 크라이슬러를 집어삼킨 거나 다름없었다는 평가도 나올 정도.]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무리한 [[인수합병]]으로 회사가 다시 재정난에 처한 건 물론 회사 라인업의 정리가 시급해졌고, [[람보르기니]]의 운영[* 아이아코카의 부하이자 회사의 상급 임원이었던 [[밥 루츠]]는 자서전을 통해 "람보르기니를 산 건 수익성보다 브랜드 때문이며, 크라이슬러 차를 람보르기니와 적절히 크로스오버해서 업그레이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식으로 크라이슬러 차종의 람보르기니 에디션을 만들라는 지시를 아이아코카가 내렸었다는 점을 회고했었다. 어떻게 보자면 람보르기니에 대한 아이아코카의 인식이나 이해를 엿볼 수 있는 대목.([[https://books.google.co.kr/books?id=ZhoC7pbRs7kC&pg=PT72&lpg=PT72&dq=chrysler+imperial+lamborghini+edition&source=bl&ots=rr6QVO8Px4&sig=Jys-l287YPzT2EO_ehmmzgLEZ9I&hl=ko&sa=X&ved=0ahUKEwiMgf-454zSAhXJfrwKHZEBApkQ6AEIOTAH#v=onepage&q=chrysler%20imperial%20lamborghini%20edition&f=false|#]][[https://www.roadandtrack.com/car-culture/a28370279/chrysler-wanted-a-lamborghini-badged-k-car/|#]][[https://www.motortrend.com/news/lamborghini-edition-chyrsler-imperial-daytona-renders/|#]])]이나 [[마세라티]]와 합작 개발한 [[크라이슬러 TC 바이 마세라티]], [[새턴(자동차)|새턴]]의 대항마로 기획한 [[https://www.thetruthaboutcars.com/2021/08/abandoned-history-chryslers-liberty-project-to-saturn-or-not-to-saturn/|리버티]](Liberty) 브랜드와 [[이글(자동차 제조사)|이글]] 브랜드[* 리버티는 새턴을 따라 매우 진보적인 국산 소형차로 수익을 내겠다고 1985년에 발표, 1990년에 런칭하려고 했으나 비용문제로 아예 개발 과정에서 취소되었다. 이글은 AMC의 승용차 부문을 개명한 뒤 과거 AMC의 모회사였던 [[르노]] 산하의 [[이글 프리미어]], [[이글 메달리온|메달리온]]같은 르노 차종 기반 라인업들과 미라쥬, RVR, 갤랑, 이클립스같은 [[미쓰비시 자동차|미쓰비시]] 차종들을 AMC 계열의 딜러망이었던 지프-이글 딜러로 몰아넣는 데 그쳤기 때문에 판매가 부진했다.]같은 무리수들이 실패한 건 물론 아이아코카가 K-바디 플랫폼의 활용과 보수적인 디자인을 고집하는 점,[* 밥 루츠가 갓 크라이슬러로 넘어온 1980년대 중반, 리 아이아코카는 루츠에게 [[포드 토러스]]와 [[머큐리 세이블]]을 언급하면서 "어차피 실패할 차들인데 이들이 출시되기 전에 크라이슬러로 잘 넘어왔다"며 [[http://www.businessinsider.com/bob-lutz-icons-and-idiots-2014-10|환영]]하기도 했다. 당시 크라이슬러에서 토러스 대항마로 준비한 차는 [[닷지 다이너스티]]와 [[크라이슬러 뉴요커]]였으며, 아이아코카는 디자인에 대한 고객조사 점수의 평균이 포드가 10점 만점에 5, 자사가 7.5점이었다며 자신만만해했다. 밥 루츠는 자서전에서 고객조사의 허점을 이야기하며 평가가 극과 극이었던 토러스/세이블, 중간 점수로만 들이찬 다이너스티/뉴요커의 평점을 설명했다. 즉 토러스와 세이블은 확실히 좋아하는 고객들 반+확실히 싫어하는 고객들 반이었다면 뉴요커와 다이너스티는 "생각은 해보겠지만 가장 먼저 살 차는 아니다"같은 그저 그런 평가로 가득했다고 설명했다. 이어서 [[밥 루츠]]는 같은 자서전에서 아이아코카를 "시대에 대한 감이 떨어지기 시작했던 1980년대까지는 무적"이라고 코멘트를 해 아이아코카가 1980년대의 시대변화를 잘못 읽은 부분이 있었다고 자평하기도 했다.][* 물론, [[1990년대]] 들어서 당시에는 상당히 혁신적이었던 '캡 포워드' 디자인의 LH 플랫폼을 선보이는 등 보수적인 디자인을 탈피한 적도 있었다.] 공장별 생산대수 유지와 매출 극대화를 위한 적극적인 뱃지 엔지니어링,[* 밥 루츠의 자서전에 따르면, 지프 그랜드 체로키를 닷지 브랜드로 공급하는 [[https://www.thedrive.com/news/33690/rare-photo-shows-never-made-dodge-version-of-the-1993-jeep-grand-cherokee|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 플리머스 호라이즌의 지프 브랜드 버전이 계획되는 등, 지프로도 뱃지 엔지니어링 라인업을 도입하려다가 지프 측의 반대로 무산된 적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주가에 대한 집착도 걸림돌이 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1달러 연봉 선언"의 진정성까지 논란에 휘말림에 따라, 아이아코카는 1992년 말 후계자로 [[로버트 이튼]](Robert Eaton)을 지명하고 회장 자리에서 사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